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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한국 서예명적 발간 기념展
: 전통이 미래다

한국서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선화예술문화재단과 예술의 전당이
함께 책을 발간하고 전시를 개최합니다.

2015.11.27 ~ 2016.01.22
  • 주최태광그룹 선화예술문화재단, 예술의 전당
  • 전시장소일주&선화갤러리
  • 관람관람전시안내 참조

태광그룹 선화예술문화재단과 예술의전당은 한국서예의 우수성을 알리고 위상을 바로잡기 위해 국보 보물급 서체를 복원하여 책으로 발간하고 이를 계승, 발전시킨 현대작가 작품을 전시합니다.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의 필법에 이르기까지 2014년부터 3년간 총 15점의 한국서예를 대표하는 서체를 책으로 선보입니다. 지난 첫 번째 전시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한 5선(황초령진흥왕순수비, 최치원 쌍계사진감선사탑비, 탄연 청평산문수원기, 한호 석봉진적첩.천자문, 황기로 차운시.이군옥시.이밸초서가행)을 김영배, 정종섭, 정하건, 백영일, 손창락, 이숭호, 문봉선, 이선경, 정웅표, 김경호, 유승호, 황석봉,김영기, 노상동, 최돈상 작가의 재해석 작품과 함께 선보입니다. 우리의 문화예술 유산이 현대까지 계승, 발전하여 이어져가는 모습을 보여드릴 뜻 깊은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5선의 국보 보물급 서체]

황초령진흥왕순수비 

진흥왕(신라24대 왕)이 개척한 국경지역을 순수(왕이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며 다니는 일)하면서 그 기념으로 각지에 시운 비석이 '진흥왕순수비'입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고, 새로 편입된 영토와 백성들을 신라에 편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순수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진흥왕은 이곳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의 '북한산비', 함남의 '황초령비','함남 이원의 '마운령비'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치원 쌍계사진감선사탑비  

진감선사탑비는 신라말의 고승 진감선사(774~850)의 공덕과 법력을 흠양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현재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탑비의 주인공인 진감선사의 법명은 혜소로 885년 헌강왕(신라 49대 왕)이 진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대공영탑이라 추가한 것에서 탑의 이름이 비롯되었습니다. 이 비는 선사의 사적을 보존하고 법도를 계승하기 위해 885년 헌강왕의 명으로 건립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헌강왕이 곧 타계하자 886년 그 뒤를 이른 정강왕의 명으로 당대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최치원(857~?)이 비문과 글씨를 쓰고 승려 환영이 글자를 새겨 이듬해인 진성여왕 즉위년(887년)에 건립되었습니다.

탄연 청평산문수원기 

청평산 문수원기비는 청평산에 은거하던 학자 이자혀(1061~1125)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1130년에 세워졌으나 6.25때 청평사가 불타면서 손실되었습니다. 이 비는 고려의 최고 문장가인 김부철(1079~1136)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가인 승려 탄영(1070~1159)이 글씨 쓴 것으로, 고려시대 유형 유물로는 유일한 유적입니다. "문수원중수비(제액에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라고 기록되어 문수원기비로 표기하시도 함)는 삼한 이래 최대 명물이다."라고 고려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백운거사 이규보(1168~1241)가 극찬한 비 입니다. 

한호 석봉진적첩.천자문 

한석봉이라는 호로 더 알려진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명필 한호(1543~1605)의 글씨입니다. 석봉진적첩은 한호의 노년 필적을 모은 것으로 그가 가평군수에서 해직된 뒤인 1602년과 흡곡현령으로 재직하던 1604년 사이에 쓴 것입니다. 석봉천자문은 1691년 숙종(1661~1720)이 친히 서문을 지어중간(이미 발행한 책을 다시 간행)했고, 영조(1694~1776)에 다시 간행했습니다. 한호는 중국 사신 행차에 5차례 동행했고, 이때 그의 글을 본 중국 학자들이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명대 후반 학자 왕세정)."는 등 높이 평가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황기로 차운시.이군옥시.이백초서가행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필로 꼽힌 고산 황기로(1525~1575)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다른 이의 시운으로 시를 지음)하여 짓고 쓴 초서입니다. 시 말미에 "축에 청천, 영천, 귤옹, 송강, 서하의 시가 있어 몇 번씩 반복함에 그칠 수 없어 이에 시를 짓다"라고 쓰여 있어 제작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산 매학정 주인 쓰다"라고 한 것을 보아 친필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기로 초서는 2점으로 차군시, 이군옥시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백의 초서가행을 쓴 초서 필적이 석각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5선을 재해석한 현대 서예가 15인] 

- 황초령진흥왕순수비 : 김영배, 정종섭, 정하건

- 최치원 쌍계사진감선사탑비 : 백영일, 손창락, 이숭호

- 탄연 청평산문수원기 : 문봉선, 이선경, 정웅표

- 한호 석봉진적첩.천자문 : 김경호, 유승호, 황석봉

- 황기로 차운시.이군옥시.이백초서가행 : 김영기, 노상동, 최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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